훼 정보

후에(베트남어: Huế / 化)는 베트남 중부에 위치한 도시로 트어티엔후에성(베트남어: Thừa Thiên-Huế / 承天-化)의 성도이다. 1802년부터 1945년까지는 베트남(응우옌 왕조)의 수도였다. 많은 역사적 기념물과 건축물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도시에 있는 후에 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인구는 약 340,000명이다.

역사

기원전 111년에 전한에 의해 설치된 일남군 소재지가 후에 근교에 위치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세기 말에 건국된 임읍(참파의 전시)의 수도가 후에 부근에 존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임읍 시대의 후에는 동남아시아 내륙의 물품을 중국에서 출시하는 선적 항구 역할을 했다. 중국 사료에 나타나는 참파의 지명인 ‘오려’(烏麗), ‘오리’(烏里)는 후에로 추정된다. 오리에는 많은 참족들이 살고 있었다. 제씨(制氏), 반씨(潘氏) 등 참족명가는 후에가 킨족화된 후에도 명문의 지위를 계속 유지했다.

1307년에 북베트남 쩐 왕조와 참파 사이에 맺어진 협정에 따라 오리는 쩐 왕조에 할양되었고 화주(化州)로 개칭되었다. 1401년부터 1402년에 걸쳐, 호 왕조는 홍강 삼각주의 주민을 후에로 이주시켰다. 1407년에 호 왕조를 멸망시킨 명나라가 베트남을 지배하자 쩐 왕조에서 살아남은 왕족은 후에를 거점으로 1413년까지 명나라에 저항을 계속했다. 1558년의 응우옌 호앙(阮潢)이 입성할 때까지 후에는 킨족화가 거의 완료되었다.

15세기 말까지의 후에는 북베트남의 정권과 참파 왕국의 국경에 위치하는 도시에 불과했지만, 16세기부터 시작되는 남북 항쟁 시대에 후에는 꽝난 완씨(廣南阮氏)의 본거지로 1636년 부춘(富春) 도성이 완성된다. 꽝난 완씨의 시대 후에는 남중국해 무역의 중심지로서 번성했고, 떠이선 왕조의 반란 시대, 1774년에 정씨(鄭氏) 찐 왕조가, 1786년에 서산 완씨(西山阮氏)의 응우옌후에가 후에를 점령했다. 후에를 본거지로 한 응우옌후에는 북평왕(北平王)이라고 칭하고, 꽝빈성으로부터 하이반 고개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했다.

후에는 원래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베트남의 남부 전역을 통치했던 봉건 왕조인 응우옌 왕조에 수도로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찐삼(베트남어: Trịnh Sâm)이 점령했던 1775년에는, 도시 이름이 푸쑤안(베트남어: Phú Xuân)이었다. 1802년 자롱은 응우옌 왕조를 세우고 베트남 전역의 통치권을 양도받게 되자, 후에는 국가 전체의 수도가 되었다. 이후 1945년까지 베트남의 수도로 자리매김한다. 황제 바오다이가 퇴위당하고 공산 정부가 출범하자 하노이가 수도로 승격된다. 1949년 친프랑스 인사와 합작하여 황제가 다시 복권을 시도하였지만 그때 황제는 후에가 아닌 사이공으로 정부청사를 세우고자 한다. 공산주의자를 비롯해 전 베트남 국민은 황제의 복고에 반대하였다.

베트남 전쟁 당시, 후에는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의 경계에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고 매우 중요한 요새 역할을 하였다. 후에는 그 경계의 남쪽, 즉 남베트남에 속해 있었는데, 후에 전투(Battle of Huế)에 속하는 1968년 구정 대공세 때, 이 도시는 물리적으로도 심각하게 피해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그 명성도 손상되었다.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건물에 미군이 폭격을 가하여 역사적인 유물과 유적이 송두리째 파괴되었다. 또한 공산주의 세력에 의하여, 악명 높은 후에 학살이 자행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도 상당 기간 동안 "봉건 시대의 유산"이라는 이유로, 역사 유적 복원과 봉건 유적에 대한 관심이 미비하여 한동안 방치되었다. 베트남 정부의 정책 쇄신을 통해 중세 왕조의 유적 복원 작업이 완료 혹은 진행 단계에 머물고 있다.

훼 황궁

가장 뛰어난 관광지이자 볼거리는 후에 황궁(베트남어: Kinh thành Huế, Imperial City, Huế)으로서 인근에 황제가 머물던 궁과 묘가 있다. 후에 전체를 통틀어 흐엉강의 북쪽 지역인 구 시가지에 대부분의 유적이 자리한다. 응우옌 왕조의 황제는 성 안에서 머물렀는데 이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공간이었다. 이 성 안쪽의 왕궁은 금지된 도시였고, 오직 황제들과 첩들 그리고 측근들만이 접근할 수 있었다.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사형을 당하였다. 후에의 역사 관광지로서 유지하기 위하여 재건축의 노력이 진행되고 있으나 오늘날 금지된 영역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802년부터 1945년까지 13대에 걸쳐 이어진 응우옌 왕조의 왕궁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요새이자 궁전이다. 이곳의 뜰은 가로 세로 각각 2킬로미터, 높이 5미터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성벽은 다시,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 해자에 담을 물은 후에를 관통하여 흐르는 흐엉강에서 끌어왔다. 이러한 구조물을 시터들(citadel)이라고 한다. 시터들 안에는 거의 2.5킬로미터의 방어선을 구축한 왕궁이 있었다. 대개의 관광객이 입장하는 왕궁의 정문인 남문 누각에 오르면 왕궁 전체가 한눈에 보인다. 남문 정면에 중국의 자금성을 본떠 지은 디엔타이호아(베트남어: Điện Thái Hoà)가 있으며 디엔타이호아의 왼쪽에 각 왕의 위패가 모셔진 사원인 현임각이 있다. 그 외에도 왕궁 안에는 왕족의 저택과 사원들, 황제를 위한 인클로져(enclosure)인 자금성(베트남어: Tử Cấm thành, the Purple Forbidden City)이 있다. 그 명칭은 중국의 자금성을 본딴 것이다. 이름만을 본딴 것이 아니어서, 자금성에는 수많은 궁전과 문, 궁정들이 있었다. 자금성은 응우옌 왕조의 황족들을 위한 곳이었다.

대략적으로 후에에서 흐엉 강을 따라서, 후에의 외곽 남쪽에 민망 황제(베트남어: Minh Mạng), 뜨득 황제(베트남어: Tự Đức), 카이딘 황제(베트남어: Khải Địn) 등의 묘지들을 포함한 무수히 많은 또다른 기념물들이 있다. 카이딘 황릉은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릉으로 1931년 완성됐다. 베트남과 유럽의 건축양식이 섞인 특이한 구조의 황릉이다. 콘크리트 석상이 유럽인의 모습과 유사하다. 내부의 옥좌에는 청동에 금박을 입힌 카이딘 황제의 등신상이 있으며 그 아래 황제의 시신이 안치돼 있다. 민망 황제릉은 내외부 장식이 아름답기로 손꼽힌다. 입구에 들어서면 초승달 모양의 인공 호수가 눈에 들어오며,황제의 공덕비가 세워진 정자 아래 쪽에 문무석 및 동물 모양의 석상들이 늘어서 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시가지는 전통을 간직한 채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1993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남쪽 지역(신 시가지)은 서울의 강남과 같이 신개발지역이 많기 때문에 거주지와 비즈니스 거점이다.

또한 티엔무 사원(베트남어: Chùa Thiên Mụ)이 유명한데, 이 사원은 강을 따라 도심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후에에서 가장 큰 사원이며 이 도시의 공식 상징이기도 하다. 레쯕(Le Truc) 거리 3번지에 있는 후에 궁전 박물관(Hue Museum of Royal Fine Arts)은 응우옌 왕조의 여러가지 다양한 유물들을 보존하고 있다. 궁정에서 사용되었던 물건과 외국에서 온 선물 등을 전시해놓은 전통가옥 모양의 본관과 철제, 석제 전시품들을 전시해놓은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다.[11] 후에는 베트남 중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한적하면서도 별난 곳이다. 베트남의 유명인들 다수가 이곳 태생이거나 후에에서 한번쯤은 머물고자 한다.